중학교 때 음악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특색있는 음악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음악 전문서적을 읽기로 했다. 박종호 작가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읽으며 클래식을 찾아 보았고, 그의 책을 따라 음반을 고르고, 추천하는 연주를 찾아 듣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추천 목록에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자가 생긴다. 그렇게 로스트로포비치는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이후 그의 음악을 찾아 헤매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음반을 듣게 되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시절, 음악을 듣는 방법은 직접 음반을 구입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 장씩 모아가던 음반들 사이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비발디 첼로 협주곡이었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음반은 따로 있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요요 마나 미샤 마이스키 같은 다른 첼리스트들과는 다른, 그의 서정적인 감성 터치가 담긴 음색에 빠져들면서 그의 음악을 깊이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비발디 협주곡을 듣게 되었고, 로스트로포비치가 보여주는 강렬한 첼로 연주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음반을 듣기 시작한 건 어느 불면의 밤이었다. 매일 밤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음악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의 비발디는 단순한 바로크 음악이 아니라, 한 편의 시(詩)처럼 고요하고 깊었다. 그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감각이 차분해지고,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 중에서도 단조(短調) 곡들은 유독 마음을 울린다. 로스트로포비치의 활 끝에서 나오는 저음은 단순한 음이 아니라, 깊은 호흡과도 같았다. G단조 협주곡(RV 417)에서는 잔잔한 밤공기를 가르는 듯한 첼로의 저음이 펼쳐진다. 느린 악장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마치 속삭이듯 조용하지만, 그 여운은 길고도 깊다.
고요한 밤, 불을 끄고 첼로 소리에만 집중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느껴지는 건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소리이기도 하고, 오랜 기억 속 잊고 있던 감정이기도 하다. 첼로가 한 음 한 음 내뱉을 때마다 나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응답하는 듯한 느낌.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언제나 그런 울림을 주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는 단순히 연주가 아니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감각이 든다. 그는 과장되지 않게, 그러나 강렬한 감성으로 선율을 그려나간다. 특히 빠른 악장에서는 힘차게 내달리면서도, 그 안에서 디테일한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바로크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접근이다. 원전 연주의 담백함과 낭만적인 감성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순간. 그래서 그의 비발디는 다르다. 그의 첼로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은 본래 바이올린이 주도하는 바로크 음악과 달리, 첼로가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도록 구성되어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단순히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첼로 특유의 깊은 울림과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해 낸다. 그의 연주는 비발디가 본래 의도한 경쾌함과 리드미컬한 에너지를 유지하면서도, 로맨틱한 감성이 더해져 한층 극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그의 활이 그리는 선율은 유려하면서도 힘이 있다. 느린 악장에서는 서정적으로 가라앉고, 빠른 악장에서는 감정이 솟구친다. 특히 저음에서의 울림은 마치 심연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처럼 깊고도 넓다. 그는 단순히 음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음악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이 음반을 듣다 보면, 음악이 깊어질수록 내 마음도 더 깊어지는 경험을 한다. 때로는 안락함을 주고, 때로는 잠들지 못하는 밤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은 원래 경쾌하고 활력 넘치는 곡이 많지만,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안에서 특별한 여백을 만들어낸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은은한 빛을 남기면서도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음악이란 결국,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하는 비발디는 내게 단순한 바로크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고요한 밤의 대화이자, 마음을 어루만지는 손길이다. 불면의 밤, 그와 함께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음악적 경험이 아닐까.